“여기에서 우리는 스스로와 싸우는, 그리고 하나님과 싸우는 한 영혼을 본다. (중략) 예레미야는 서슴치 않고 그의 하나님을 향해 퉁명 스럽게 불공평함을 항변하였다. 그의 백성을 비난하는 일은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그는 결코 예언자의 일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켰다(17:15-16). 그는 그 일에서 뛰쳐 나가기를 바랬다(9:2). (중략) 조롱의 대상이 된 그는 거의 불경에 가까운 언어로 하나님께 욕을 하며 하나님이 그를 ‘권유’하여(20:7) 자신이 속았다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거슬러 싸웠지만 단지 하나님이 자신보다 강하여 자신을 이겼다고 비난하였다. (중략) 그가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였을 때 그는 그가 한때 ‘생수의 근원’(2:13) 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하나님이 마름 개울만도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영적 자원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제로 그에게 임했다.” --> 렘 20:9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신앙은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 배우게 된다. 그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기 때문에 질문에 의해서 괴로움 당할 필요가 없는 잘난 체 하는 신앙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모든 질문들을 묻고 대답은 거의 듣지 못하면서도 너의 허리띠를 졸라매라! 너의 의무를 다하라! 너의 소명을 기억하라! 네 자신을 하나님에게로 내 던지라!는 명령을 듣는 신앙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예레미야는 종교의 목적을 원만한 성격, 두려움과 의혹과 좌절로부터의 자유라고 여기는 대중적이고 현대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예레미야는 원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고통에 가득판 삶의 마지막까지 그가 ‘평안’이라는 말의 뜻을 알았는지 의심스럽다. (중략) 그는 정신적 영적 건강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의 믿음의 기능에 대해, 혹은 그 무엇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기술들에 대해 뜻 없는 말을 늘어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예레미야가 원만한 성격을 가졌었다면 예레미야가 될 수 없다."
"영적인 건강은 좋은 것이다. 정신적 안정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소명은 원만한 성격을 형성하고자, 혹은 모든 질문들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헌신하도록 부르는 것이다 – 모든 두려움과 문제들을 지닌 채 자신의 책임과 하나님의 지배하에서의 자신의 운명에로 부름받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끝없는 심령의 겟세마네로부터 이상하게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인간적 감정의 폭발과, 하나님과 운명에 대항한 그의 통렬한 불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극심한 고통을 참아 낸,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그는, 마음이 위축되고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고 싶을 때, 그래도 그의 마음 속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눅22:42)라고 말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
(143-146쪽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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