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최근 “1950-70년대 영락교회 신앙 정체성 연구”이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을 쓴 바가 있습니다. 이유인즉, 평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의 목사로서 통합측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 역사적 질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합측의 신앙 정체성은 무엇인가? 통합측의 목사로서 어떠한 목회 비전을 지녀야 하는가?' 그러던 중 통합측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한경직 목사님(이하 한 목사님)과 그분의 목양지였던 영락교회(이하 영락)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1950-70년대의 영락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성공한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한국 장로교의 복음주의 정신을 보수·계승하고자 했던 깊은 역사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즉 19세기 말, 초기 내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 정체성이었으며 또한 1912년 최초의 첫 장로교 총회가 스스로의 신학 정체성으로 드러낸 18·19세기 영미 복음주의를 영락교회가 보수 및 계승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개인구원’과 ‘국가구원’의 신앙이었습니다.
영락교회는 첫째, 개인구원을 위해 부흥회적 경건, 뜨거운 전도 활동, 지속적인 교회 개척, 해외 선교, 군 선교 등에 전념했습니다. 둘째, 영락교회는 국가구원의 염원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마땅히 그 존엄성을 회복하고 누려야 한다는 성경적 정신(신부적 인간관)에 따라 영락은 6‧25 전란 중의 각종 구호 활동, 전쟁 이후 다양한 교육 사업 등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근간으로 하는 사상이라 하여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강조했습니다. 1950-70년대의 영락의 발전상은 단순히 개교회 성공담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당시 영락의 신학과 신앙은 통합측의 복음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1950-70년대의 영락이 드러낸 통합측의 개인구원의 신앙은 곧 작고 연약한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크신 품에 안겨 구원을 누려야 한다는 정신이었으며, 국가 구원의 신앙은 작고 연약한 우리의 뜻보다는 예수님의 크신 뜻을 앞장 세워 고난 당하는 많은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정신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통합측 교단의 목사로서 저는, 과거 국가구원에만 치우쳤던 자유주의적 신학과 결별하였고, 개인구원에만 몰두했던 근본주의적 신학을 극복한 통합측의 복음주의 신학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우리 교회는 통합측 교단에 소속된 교회로서 복음주의 목회, 즉 많은 영혼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개인 구원의 사역과, 많은 이웃을 섬기는 국가 구원의 사역을 병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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